꿈에 그리던 년 먹고 체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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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아주 훌륭했어. 언감생심 내가 한국에서 호텔에 잘 일이 뭐 있었겠어. 여자랑 잘 일 있으면 잘 구슬려서 자취방 데려가거나, 가오 좀 살려야 되는 경우에만 눈물을 머금고 모텔가는 정도의 형편밖에 안됐는데 말야. IMF때문에 망한집 아들래미를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거든. 난 수정이에게 너무 고마웠어. 오랜만에 만나는 오빠와 좋은 데서 자고 싶었다는 마음, 그리고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아서 호텔을 예약하고 결제해둔 배려. 내가 여자 하난 잘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그동안의 그리움을 달랬어. 이제 직장인티가 제법 나는 수정이는 필리핀에 있을 때와는 또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어. 더운 날씨의 필리핀에서는 수정이의 이런 오피스룩은 보지도 못했으니까. 펜슬스커트 아래로 곧게뻗은 다리를 감싼 검은 스타킹은 마지막으로 본지가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할 만큼 새로운 흥분을 선사했어. 스타킹위 허벅지며 종아리를 손으로 쓰다듬고 얼굴을 부비다 옷을 훌훌 벗기고,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끌어안았어.
뜨거운 두 배가 맞닿았고 미칠듯한 감정이 끓어올랐어. 그리고 우린 차렷자세로 열심히 섹스를 했지..이런 젠장...오랜만이어서 괜찮긴 했지만 이래서는 될 게 아니었어. 하지만 체위를 바꾸면 이내 수정이의 신음소리는 잠잠해졌고, 내가 다시 엎드려 차렷자세를 맞춰주면 수정이는 달아올랐어. 어쩔수 없지뭐..그리고 그간 필리피나들에 적응된 나는 무슨 거인과 섹스를 나누는 그런 기분을 느끼며 열심히 허리를 놀려댔어. 회포를 푼 뒤 난 지쳐서 잠이 들락말락했지만 수정이는 얘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어.
"오빠"
"응?"
"이제 한국 들어왔는데 뭐할거야?"
"일단 자야지. 내일은 같이 밥먹고"
"아니 그런거 말고 앞으로의 계획 말야"
"뭐 일단 복학해야지"
"그리고?"
"뭔소리야 그리고라니?"
"뭐 졸업하고 그 이후에 어디 취직하고 뭐 이런 계획 안 세워놨어?"
"으..음..그게 말야. 내가 지금 복학하면 3학년인데 2년을 더 다녀야하는데 벌써 그런게 있어야 되나"
"음..알았어. 오빠가 잘 하겠지"
이때 눈치를 채야했어. 수정이는 나와 맞지 않는 아이라는 걸 말야. 난 아무런 계획이 없었거든. 게다가 기본적으로 난 내 일도 남일처럼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계획 따위를 세우고 그에 맞춰 생활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어. 그리고 난 2년 남은 대학생활을 책만 쳐 파면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거든 하지만 수정이는 시기에 맞춘 경력개발과 향후 취업계획 같은 걸 내가 당연히 세우고 있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어.
이런 차이는 내가 한국생활에 다시 적응하는 동안 심심찮게 불거져 나왔어. 필리핀 연수생들이 흔히 겪는 부적응인데, 빤스까지 다 다려주는 헬퍼가 있는 집에서 유유자적 영어나 나불거리며 다니다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차가운 한국의 현실에 자신을 끼워넣으려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지. 난 대충 학부 수업을 받으며, 이따금씩 포커를 치고 나이트를 다니고 친구놈들과 자취방에서 낄낄대는 룸펜 생활을 지속했어.
한편 수정이는 본인의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내 생활에 개입하기 시작했지. 8시경 퇴근을 하는데 한시간여의 퇴근길을 무조건 나와 통화하는 것으로 채우려했어. 죽을 맛이었지.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한시간씩 여친과 통화를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에 나는 스타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야동을 볼 수도 있고, 공부를 할 수도, 당구를 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그 모든 작업을 정지하고 통화를 해야하는거야. 곧 난 불만을 토로했어.
"수정아. 퇴근길에 버스 타잖아. 그런데 버스 안에서 통화하는거 좀 그렇지 않니"
"왜?"
"난 대중교통 이용할 땐 통화 하는거 좀 그렇던데.."
"작게 얘기하면 되잖아.."
"옆에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 퇴근할 때 통화하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에티켓 같은거지. 내 여자가 무례하게 보이는거 싫으니까"
"알았어 그럼 내려서 전화할게"
"내려서?"
"응 정류장 내려서 15분 정도 골목길 걸어가야돼. 통화 하면서 안가면 무서워."
거기까지가 마지노선이었어. 젠장. 시간은 줄었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에 통화를 해야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지. 하지만 그 어두운 골목을 걸어갈 때 나랑 통화라도 해야 안심이 된다는데 어떡하겠어. 그렇다고 내가 그 멀리까지 데려다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냥 포기하기로 했어.
그리고 점점 직장인여친-대학생남친이 겪을 수밖에 없는 멍청한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지. 우선 난 가난했어. 필리핀에서야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난 절약하는 생활을 할수밖에 없었지. 학생식당이나 학교주변 싼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그도 아니면 집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생활했어. 하지만 수정이는 돈을 버는 여자였어. 게다가 수정이 친구들은 다들 강남, 강동쪽 유복한 집 딸래미들이더라. 당연히 내가 걔네를 만나서 한턱을 낸다거나 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어.
"오빠 오늘 빕스가자"
"빕스? 거기 패밀리 레스토랑 아니냐?"
"응 왜?"
"너 오늘 생일이야?"
"ㅋㅋ 뭔소리야"
이따위의 대화들이 오갔지. 물론 수정이가 낼때도 있었지만 항상 얻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번 그런델 갔다오면 난 일주일치 생활비가 비는거야. 이뿐만 아니라 수정이가 좋아하는 파스타며 피자며 이런 것들만 먹어서는 내가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어. 하루는 내가 따졌어.
"맨날 이런 것만 먹냐?"
"왜 맛 없어?"
"아니 내가 먹고 싶은거 예를 들면 김치찌개 같은거 먹을 수 있잖아"
"오빠네 학교 주변 식당 같은거? 나 그런데 싫어하잖아.."
"내가 좋아하잖아"
"알았어 그럼"
하고 따라온 수정이는 분노의 식사를 마친 내게 "이제 오빠가 먹고싶은거 먹었으니,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며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옮기는 그런 여자였어. 수정이는 내가 과외 알바라도 하기를 원했어. 하지만 그때쯤엔 1,2학년때 비어버린 학점을 채우고 좀 사람답게 살아야겠다는 압박감을 스스로도 느낀 때라 학부 수업에 열중하고 싶었어. 학점. 그게 게으른 내가 설정한 최우선 타겟이었어. 하지만 수정이는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어. 어느 퇴근길에는..
"오빠. 나 집에 가는 길. 뭐하고 있었어?"
"응 그냥 담배 한 대 피고 인터넷 좀 하고"
"공부 안해?"
"공부했어"
"무슨 공부?"
"그런 것까지 말해야 되나.."
"나는 오빠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인턴도 하고 준비를 착착 해나갔으면 좋겠어."
"그래..할거야"
"근데 가만 보면 오빠는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거 같아. 내가 오빠처럼 좋은 대학 다니고 그랬으면 진짜 좋은 직장 갖고 막.."
"그만해라"
"오빠 공부 열심히 할거지? 그래야 우리도 빨리 결혼하지. 나 언니들이랑 더 살기 싫어."
부모님이 해도 듣기 싫은 게 "공부 좀해라"라는 소린데 난 그걸 여친한테서 쳐 듣고 앉았는거야. 슬슬 빡치기 시작했어. 물론 나 잘되라고 하는 뜻도 있지만 내게 느껴진 건 '빨리 훌륭한 직장을 얻어서 나와 결혼해서 날 이 환경에서 탈출시켜 다오' 같은 거였어. 그런 거였다면 차라리 돈많은 집 멍청이를 남친으로 고르는게 나았을 텐데 왜 나야 시발...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
그리고 일 때문에 바빠진 수정이는 내 방에서 자고 가는 날도 그리 많지 않았어. 기껏해야 한달에 한 두번 정도 난 수정이와 섹스를 나눌 뿐이었지. 섹스를 마친 뒤에도 수정이는 담날 출근을 이유로 옷을 다시 챙겨입고서는 집으로 돌아갔어. 바쁜 여자친구를 보내고 텅빈 방에 혼자 남아있는 건 마치 내가 늙은 퇴기라도 된 듯한 쓸쓸함을 남겨줬어.
그리고 6개월이 흘렀어. 난 등록금을 낼 방법이 없어 휴학을 했고, 과외알바를 시작했어. 수정이는 왜 내가 인턴을 하지 않냐며 다그쳤지만 학점을 메꾸지 못한 내가 돈도 두둑히 주는 인턴자리를 잡기는 힘들다는 내 항변은 듣지도 않았어. 그때쯤 수정이 친구의 생일이 있었고, 수정이는 실수로 내게 안해야 될 말을 해버렸어.
"경원이 생일 호텔방 잡아서 했는데 재밌더라 오빠 ㅎㅎ"
"니넨 맨날 호텔잡냐 ㅋ"
"응 남자친구 있는 애들은 다 데려왔으니까 뭐 공간도 필요하고.."
"뭐?"
"아..응 아냐"
수정이는 남친/여친 동반 생일파티에 그냥 다녀온 거였어. 물론 가자고 해도 내가 안 갔겠지만 아예 얘기조차 안했다는게 빡치는 일이었지.
"넌 누구랑 갔는데?"
"아..오빠~~"
"누구랑 갔냐고?"
"혼자 갔지.."
"너 남친 있는거 니 친구들이 모르냐?"
"알아.."
"그런데 시발 그냥 간거냐? 나한텐 얘기도 않고?"
"얘기하면? 오빠가 갔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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